이동 삭제 역사 ACL 마이클 조던/생애 (r2 문단 편집) [오류!] 편집기 RAW 편집 미리보기 굵게기울임취소선링크파일각주틀 === 1985-86 시즌과 그 이후 === 큰 기대를 안고 시작한 소포모어 시즌, 조던은 홈 개막전에서 클리블랜드를 상대로 29점을 넣으며 1점차 승, 이후 디트로이트를 상대로 33점을 넣고, 이후 골든스테이트를 이기며 산뜻하게 3연승으로 시즌을 시작한다. 그러나 문제는 세 번째 경기에서 일어났다. 당시에 만들어진 농구화를 신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이때 농구화는 쿠셔닝이라고 할만한 게 전혀 없었다. 이 때문에 당시 조던, 줄리어스 어빙, 데이비드 톰슨 등 고공 플레이를 펼치는 선수들은 덩크 슛 시도를 지금만큼 자주 하지 않았으며, 착지할 때 발가락으로부터 발등까지 무게를 분산시키며 사뿐하게 착지했다. 그러나 이 경기에서 앨리웁을 위해 점프했던 조던은 이걸 깜빡했는지 그냥 발 전체로 쾅 착지해버렸고, 바로 발에 금이 가는 부상을 입고 만다. 그 대가는 처참했다. 조던은 이후 64경기를 결장해야 했고 시카고는 바로 4연패, 1승 후 다시 4연패를 하는 등 21승 43패로 32.8%란 처참한 승률에 그쳐야했다. 그러나 조던은 재활 끝에 일정보다 더 빠르게 복귀를 해냈다. 훗날 밝혀진 일화에 따르면 조던은 학업을 끝마친다는 핑계로 UNC에 복귀해서 불스에 알리지 않고 1대1, 2대2 시합을 거쳐 5대5 시합까지 뛰었고 나중에 그 사실을 알게 된 제리 라인스도프 구단주가 의사로부터 똑같은 자리를 다칠 확률이 10%인데 그때는 선수경력 끝이라는 얘기를 들었다는 이유 + 어차피 시즌 망했다는 이유로 조던을 남은 시즌에도 출전시키지 않으려 했으나 조던의 황소고집을 못이기고 출전시간을 제한하는 조건으로 복귀를 허락한다. [[마이클 조던 - 더 라스트 댄스]]에 나온 바에 따르면 조던은 재발 확률이 10%밖에 안된다는 소리를 듣고 빡쳐서 "90% 확률로 안 다치는 거잖아요"라고 당장 뛴다고 나섰으나 구단주는 "마이클. 자네는 지금 위험-보상 비율(risk-reward ratio)에 대해 제대로 이해를 못 하고 있는 것 같네. 만약 자네가 끔찍한 두통이 있는데 내가 약통을 줬다고 치세. 그 중 9개 약은 자넬 낫게하고 하나는 자네를 죽인다고 한다면, 약을 먹겠나?"라고 질문했다. 그러자 조던은 "그 두통이 얼마나 염병할 정도로 심한지(f---king bad)에 따라 달렸죠"라고 답했다. 농구를 향한 조던의 갈증을 엿볼 수 있는 부분. 복귀 이후에도 한동안 불스는 조던의 출장시간을 조절했다. 초반에는 전/후반당 최대 7분씩이었다. 실제로 코치진이 스톱워치를 들고 시간을 칼같이 쟀고, 시간이 지나면 바로 뺐는데 당시 경기를 보면 교체 당한 뒤 벤치에 앉아 씩씩거리며 울분을 참는 조던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실제로 조던은 부상이나 체력 회복을 핑계로 경기를 쉰다는 개념을 납득하지 못했는데, 부상 전까지 고등학교/대학교/프로 때까지 단 한경기도 쉬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에도 거의 결장을 하지 않았고[* 조던은 2년차 시즌 이후 불스에서 뛴 11시즌동안(95년은 시즌 막판에 복귀해 실질적으로 10시즌) 총합 7경기를 결장했고 그 중 2경기는 리그 징계로 인한 결장이었다. 88-89시즌에 사타구니 부상으로 1경기를 결장하고, 91-92시즌에 유타 재즈와의 경기 중 심판에게 항의 도중 심판을 들이받아 1경기 징계를 받아 결장, 92-93에는 발 부상으로 총 3경기, 그리고 인디애나의 레지 밀러와의 싸움으로 1경기 징계를 받았다. 플레이오프에선 커리어 내내 단 한 경기도 결장하지 않았다. 즉, 10시즌간 부상으로 쉰 경기가 총 5경기이다.], 1차 은퇴 후 복귀하고서는 2차 은퇴전까지 프리 시즌이나 시범경기를 포함해 모든 경기에서 뛰었으며, 워싱턴에서 30대후반 나이에 복귀했을때도 무릎이 나가고 나서도 통증을 참고 7경기나 더 뛰다가 수술했으며, 수술 이후에 시즌아웃될거란 예상을 깨고 조기복귀했다가 부상이 재발해 결국 아웃되었다. 그 다음 시즌은 전경기 출장...이 정도로 몸을 아끼지 않고 뛰는 선수니 출장시간 제한이 답답했던 것. 조던이 조금 뛰었던 첫 네 경기에서 불스는 4연패를 당한다. 조던의 시카고 시절 유일한 한 자리 득점(8점)도 이때 나왔다. 그러나 출장시간을 19분으로 조금 늘린 뉴욕 닉스전에서 승리를 거둔 이후 불스는 눈에 띄게 나아진 모습을 보인다. 조던의 출장시간이 20분대 이상으로 늘어난 이후부터 불스는 5승 4패, 조던은 28.9분 동안 27.3점 3.8리바운드 3.4어시스트 2.3스틸 1.6블록에 필드골 성공률 49.5%를 기록한다. 조던 치곤 아쉬운 수치지만 조금씩 감을 찾아가는 걸 알 수 있었다. 이후 시작된 보스턴 셀틱스와의 플레이오프, 당시 셀틱스는 래리 버드 시절 셀틱스 중 단연 최고 전력이며 당시 기준으로 역대 4위의 승률을 자랑하던 팀이었다.[* 2018년 기준으로 역대 7위.] 이 팀을 상대로 정규 시즌 30승에 그친 불스는 패하는 게 당연한 경기였다. 그러나 조던은 이 최강 셀틱스의 최대 장점인 수비진과 리그 최고의 외곽 수비수 중 하나였던 데니스 존슨 등을 상대로 1차전에 적지에서 무려 49점을 퍼붓는다. 그러나 경기 자체는 셀틱스가 무난하게 19점차로 이긴다. [[파일:1985년 마이클 조던 63득점 경기_in 보스턴.jpg]] 그리고 펼쳐진 2차전에서 조던은 더욱 놀라운 일을 해낸다. 지금까지도 플레이오프 한 경기 최다 득점 기록으로 남아있는 '''63점을 퍼부은 것!'''[* 바로 이 경기. [[http://www.youtube.com/watch?v=xi1aO17iKxI|#]] 49초 짜리 하이라이트 영상이다. 조던이 크로스 오버 연타로 [[래리 버드]]를 농락하며 점퍼를 집어넣는 모습은 17초부터 나온다.] 아무리 막아도 비집고 들어가고, 잡아 끌어도 슛을 성공시키는 조던의 플레이에 질린 [[래리 버드]]는 경기 후 '''"신이 마이클 조던으로 변장한 것 같다(I think it's God disguised as Michael Jordan)"'''라는 농구계에 길이 남는 명언을 남겼다. 1차전 49득점, 2차전 63득점을 기록했고 게다가 그 과정에서 알고도 못 막을 움직임을 통해 상대 선수들을 따돌리고 넣을 뿐만 아니라 아무리 막고 잡아당겨도 결국 뿌리치고 슛을 넣으니 그런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참고로 이때 마이클 조던이 신고 있던 [[에어 조던 1]]의 경우에는 치료를 위한 발목 지지대가 결합된 [[에어 조던 1]] [[https://www.jordan.com/collection/air-jordan-1/air-jordan-1-unreleased-black-red-banned-unreleased|스트랩 버전]]을 장착하고 뛰었다. 전세계에 단 두족만 제작 되었고 둘다 마이클 조던이 실착했다.] 경기 자체는 2차 연장 접전 끝에 135:131로 보스턴이 이겼지만, 조던이 보스턴 측이나 농구계 전반에 준 충격이 어찌나 대단했던지, 조던이 3차전에는 '''77득점'''을 올리는 게 아니냐 하는 반농담성 예측까지 하게 되었다. 물론 실제로 그렇게 되진 않았다. 참고로 두 팀의 전력을 생각하면 2차 연장까지 몰고 간 것 자체가 기적이었다. 이 해 셀틱스는 아직도 1987 레이커스, 1996 불스 등과 함께 '''역대 최고의 팀'''을 논할 때 거론된다.[* 이외에도 1971년 벅스, 2017년 워리어스가 거론된다.] 게다가 이 시즌에 셀틱스는 정규 시즌에 홈에서 아직까지 기록으로 남아있는 '''40승 1패'''를 기록했고, 플레이오프에서는 '''단 1패도 하지 않았다.''' 즉, 1986 보스턴을 홈에서 꺾는다는 건 레이커스를 센세이셔널하게 꺾고 올라온 트윈타워의 휴스턴 로키츠도, 슈퍼스타 도미니크 윌킨스가 이끌었고 배드 보이즈를 제압했고 올라왔던 애틀란타 호크스도, 수비의 달인이던 폴 프레시와 시드니 몽크레프, 20-10에 가까운 기록을 내던 빅맨 테리 커밍스 등이 버티며 4년 연속 동부 컨퍼런스 파이널에 오른 밀워키 벅스 등 강팀들에게도 불가능한 일이었던 것이다. 근데 이걸 플레이오프에 턱걸이로 올라온 불스가 거의 해낼 뻔한 것이었다. 1986 불스는 이 해 조던의 공백을 이겨내지 못하고 '''30승에 그쳤다.''' 당시 우승권 팀은 동부 컨퍼런스가 더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50승 이상이 서부 컨퍼런스는 2팀, 동부 컨퍼런스는 4팀) 중위권 이하 팀부터는 동부 컨퍼런스가 약세를 보였는데, 시카고가 기록한 30승은 서부 컨퍼런스 꼴찌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와 동급이었다. 게다가 당시는 23팀 중 16팀이나 플레이오프에 나가는 널널한 기준이었다. 즉, 바닥에 가까운 전력의 팀이 압도적인 최강의 팀과 붙었는데, 한 선수가 미친듯이 날뛰어서 역대급 업셋을 이뤄낼 뻔한 것이다. 이상하게도 버드의 해당 코멘트가 비꼬는 말이거나 [[정신승리]]라는 게 '''국내''' 농구팬들 사이에서는 마치 사실처럼 퍼지고 있는데, 정작 미국에서는 그런 시각이 전혀 없다. 참고로 당시 버드의 인터뷰 전문은 "마이클이 우리한테 한 걸 할 수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을 겁니다. 그는 오늘 경기에서 가장 흥미진진하고, 기가 막힌 선수였습니다. 그냥 신이 마이클 조던으로 변장한 것 같았습니다."이다. 원문을 확인하고 싶으면 [[http://www.nba.com/history/jordan63_moments.html|여기]]서 확인해보자. 앞뒤 문장을 살펴봐도 비꼬는 발언이라고 하기 힘들다. 이런 엄청난 활약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결국은 자기 팀이 이겼으니, [[김응용]] 감독이 [[김성근]] 감독을 "야구의 신"이라고 불렀다는 얘기처럼[* 실제로는 저 정도로 극찬하는 뉘앙스가 아니라 그냥 나름대로 친분이 있는 편인 동년배를 적당히 립 서비스로 띄워주는 느낌이었다. 당장 김성근 본인도 김응용의 저 발언에 대해 묻는 기자에게 '내가 신이면 신을 이긴 자기는 뭐가 되는 거냐'라고 말하면서 웃어넘긴 바 있다.] 결과적으로 자기 팀을 띄우는 발언이 될 수 있긴 하지만, 이때 버드의 인터뷰는 순수하게 조던의 엄청난 기량에 감탄하는 뉘앙스에 가까웠다. 참고로 이때 버드는 조던의 활약에 대해 얘기하면서 질린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는데, 1년 후 파이널에서 레이커스에 패하고 "[[매직 존슨|매직]]은 내가 본 최고의 선수였다."라고 할 때도 이렇게 고개를 흔들면서 인터뷰했다. 버드가 이빨이 상당히 신랄하기로 유명한 선수긴 했지만 그렇다고 융통성 없는 양반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버드는 항목에도 나와있지만 말과 함께 압도적인 실력으로 상대방을 깔아뭉개는 걸 즐기는 선수였다. "내가 저기서 공을 잡아서 저기로 이동해 위닝샷을 넣을 거야"라고 친절히 알려준 다음에 '''그대로 실행한다'''던지... 비록 저 상황에서 셀틱스가 이기긴 했지만 당시 모든 포커스는 조던에게 있었고, 게다가 역대 최강의 팀이자 역대 최강의 수비팀 중 하나가 2년차 가드에게 플레이오프 한 경기 역대 최다 득점을 내준 상태에서 67승이 30승 팀을 이기는 건 '''전혀 자랑할만한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쪽팔린 일이었지. 위에 언급된 파이널 패배 이후 인터뷰처럼 버드는 상대방을 인정해야 할 경우 시원하게 인정하는 편이다.[* 2004년 핸드체킹룰 개정 이후 60점 이상 초고득점 경기가 예전에 비해 잦아지면서 이게 얼마나 대단한 기록인지 공감을 못하는 이들도 있는데, '''플레이오프'''에서 60점을 넘긴 선수는 아직도 조던과 엘진 베일러(62년 파이널/61점) 뿐이다. 마이클 조던이 97년 플레이오프에서 55점을 넘긴 이후 지난 25년간 플레이오프에서 55점을 넘긴 케이스는 2003년의 앨런 아이버슨(55점), 2020년의 도노반 미첼(57점), 가장 최근에 2021년에 대미언 릴라드(55점)까지 단 세 번 뿐이다.(조던은 커리어 통틀어 5번 넘겼다) 저 외에는 윌트 체임벌린(56점/62년), 찰스 바클리(56점/94년), 릭 베리(55점/67년) 뿐이다. 즉 2020년대 공격농구 트렌드가 열리기 전까지 60년대 2번, 70년대 0번, 00년대 1번, 10년대 0번이었던 55+경기를 80년대에 혼자 2번, 90년대에 3번 한 게 조던이다. 조던을 제외하면 90년대에 55점을 넘긴 선수는 바클리 뿐이고, 80년대엔 아무도 없다. 80년대는 리그 전반적인 페이스가 빨라 전체득점 자체는 높은 편이었지만, 선수들의 전반적인 사이즈가 커지고 기술이 발전한 것에 비해 아직 선수보호를 위한 룰이 도입되기 전이라 굉장히 피지컬한 시대여서 초고득점 경기의 빈도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정규시즌까지 통틀어도 80년대에 조던 외에 60점을 넘긴 선수는 [[래리 버드]] 한 명/한번 뿐이다.(조던 5번).] 1987-88 시즌에는 든든한 조력자 [[찰스 오클리]]를 필두로 팀이 점점 짜임새를 갖추게 되면서 50승 32패를 하며 생애 첫 MVP를 수상한다. 이때 불스는 조던의 탁월한 운동능력을 활용하는 독특한 전략 몇개를 사용했는데, 그 중에 얼리오펜스 중 하나로 상대 수비가 짜여지기도 전에 조던이 전광석화같이 골밑으로 질주하면 빅맨들이 그에게 롱패스를 찔러주는 것이다. 이는 조던의 기동력이 상상을 초월했기 때문에 가능한 전략. 또 슈퍼스타 센터들을 상대할 때 시카고의 빅맨들이 버티고 있으면 조던이 기습적으로 뒤나 옆에서 블록을 해버리는 전술도 있었는데, 당시 불스의 빅맨들은 블록 능력이 평범한 편이었기 때문에 조던의 센스와 높이를 활용해 이와같은 전술을 한 것. 1987 드래프트에서 불스는 [[호레이스 그랜트]]와 [[스카티 피펜]]이란 좋은 원석들을 발굴해내는데, 이들은 루키 시즌에 20여분을 벤치멤버로 뛰며 기량을 갈고 닦게 된다.[* 그러나 하필 피펜이 입단한 이후에야 1라운드를 통과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조던 안티들의 유서깊은 개드립인 "조던은 피펜 없이는 1라운드 통과도 못했다"는 생억지가 나오게 됐다. (한국보다 미국에서 이런 개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많고, 아직까지도 유튜브에 조던 경기가 나오면 달리는 단골 댓글 중 하나다)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지만 루키 시즌인 87-88시즌 피펜은 1라운드 5차전이 되어서야 주전으로 나오기 시작했으며 플레이오프 통틀어 10경기 중 6경기만 주전, 평균 29.4분을 뛰며 평균 10점 5.2리바운드 2.4어시스트를 기록하는 평범한 롤플레이어였다. 심지어 88-89시즌 초반엔 주전도 아니었다가 샘 원래 주전 포워드로 낙점되었던 브래드 셀러스가 형편없는 기량을 보이자 초중반부부터 주전으로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1989년까지 아무런 수상이력도, 심지어 올루키 이력도 없던 피펜이 팀 전력에서 차지하는 지분은 미미했다.(다만 1988년까진 올-루키 퍼스트 팀까지밖에 없긴 했다. 물론 올-루키 팀이 세컨드 팀까지 있다고 해고 루키 시즌 당시 평균 20분 좀 넘게 뛰던 피펜이 선정되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1988년 오프 시즌에 불스는 변화를 겪게 된다.일단 가장 중요한 것은 찰스 오클리가 뉴욕의 [[빌 카트라이트]]와 맞트레이드된 것. 카트라이트는 데뷔 시즌에 20-9에 올스타도 올랐던 선수였지만 당 만 31세로 전성기가 지났고[* 1980년대에는 선수생명이 전체적으로 짧았다.] 거듭된 부상으로 1984-85 시즌을 통째로 쉬고 그 다음시즌도 2경기, 1986-87 시즌도 58경기만 뛰는 등 기량이 완연히 하락한 상태였다. 초창기의 [[패트릭 유잉]]과 한때 트윈타워를 결성했으나 이미 1987-88 시즌에 벤치로 밀려난 상태로 기록도 11.1점 4.7리바운드로 형편없었다. 그런 카트라이트와 만 25세로 이제 전성기를 향해 달려가면서 12.4점 13리바운드를 기록한 오클리가 트레이드된 것. 당시 조던은 자신과 친한데다 기량도 좋고 호흡도 잘 맞으며 거친 수비로부터 자신을 보호해주던[* 후술될 디트로이트의 '조던 룰' 만큼은 아니라도 80년대 NBA는 지금보다 훨씬 거칠었고 전술도 외곽보다는 골밑위주로 돌아갔기 때문에 자연히 돌파하던 조던이 거친 파울의 대상이 되는 일이 잦았는데 조던이 그렇게 나뒹굴때마다 상대에게 경고해주고 때로는 싸워주던 문자 그대로 보디가드 역할을 해주던게 찰스 오클리였다.] 오클리를 버리고 퇴물에 가까운 카트라이트를 데려온 것에 분노했다고 전해진다. 이 때문에 초창기에는 카트라이트의 실력을 못 믿고 그를 괴롭히기도 했다. 그러나 이 트레이드에는 당시 GM 제리 크라우스의 큰 그림이 있었는데, 오클리는 좋은 선수였지만 206cm의 키로 골밑을 수호하는데는 한계가 있었다. 이에 7피트 1인치에 달하는데다 수비센스가 여전했던 카트라이트를 데려온 것. 또한 전 시즌에 드래프트한 그랜트가 성장하면 오클리의 빈자리를 메울 수 있을 것이라 믿었고 이는 실제로 이뤄졌다. 이를 바탕으로 1988-89시즌엔 그랜트가 풀타임 주전, 피펜이 초중반 이후부터 주전으로 올라오게 된다.[* 시즌 극초반에 불스의 스몰 포워드 주전은 브래드 셀러스란 선수가 차지했는데, 무려 7피트에 달하는 스몰 포워드였으나 외곽플레이를 하기엔 기술이 부족하고 골밑에서 뛰기엔 파워가 부족한 트위너였다.. 나름 상위픽으로 뽑힌 기대주였으나 이 시즌 이후 트레이드, 이후 NBA에서 조금 더 뛰다가 버티지 못하고 유럽으로 넘어간다.] 포인트 가드의 경우 아직 샘 빈센트가 주전으로 많이 나왔지만 점점 1차 3연패 당시 주전라인업이 완성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 불스는 아직 실험단계였으며 어떤 시스템이 가장 좋을지 모르는 상황. 이 상황에서 감독 콜린스는 시즌 후반에 조던을 아예 포인트 가드로 기용하게 된다. 조던은 이 상황에서 32점 8리바운드 8어시스트란 좋은 성적과 연속 트리플더블을 쏟아내며 기대 이상의 활약을 하지만, 시카고는 전 시즌보다 떨어진 47승 35패에 그치며 6번시드를 받게 된다. 이 상황에서 1라운드 상대는 얄궂게도 전 시즌에 맞붙은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 전 시즌에 불스가 3번 시드, 클리블랜드가 6번 시드로 붙었으나 시드가 맞바뀐 상태였다. 게다가 당시 클리블랜드는 [[마크 프라이스]], [[브래드 도허티]], [[래리 낸스]]의 올스타 3인방에 론 하퍼까지 있어 당시로서는 프랜차이즈 사상 최고 기록인 57승을 거두는 성과를 거뒀다. 이 시절 젊고 유망한 팀이었던 클리블랜드는 나이대가 비슷하고 비슷하게 떠오르는 팀이었던 조던의 불스에게 88~93시즌까지 네 번 붙어 네 번 모두 패배하는 등 아주 처절하게 당했다. 하지만 많이들 간과되는 것이 [[마크 프라이스]]가 이끌던 당시 클리블랜드는 89시즌과 92시즌에 57승을 거두며 [[르브론 제임스]] 시절 이전까지 팀 역사상 가장 강한 전력을 구축했다는 것이다. 위에 언급됐다시피 다소 불안한 불스의 전력과 반대로 당시 클리블랜드는 도허티가 두 번째 올스타 선정, 무명의 유망주였던 프라이스가 생애 첫 올스타와 올-NBA 서드 팀에 오르며 전성기가 시작되었고, 베테랑 래리 낸스는 역시 여전한 기량을 보이며 생애 첫 올-디펜시브 퍼스트 팀에 오른 참이었다. 이 팀의 전력이 얼마나 좋았는지 당시 시카고 불스가 원정을 떠날 때는 시카고 지역 신문의 기자 세 명이 동행했는데 이들도 '''전부 클리블랜드의 시리즈 승리를 점쳤다.''' 이 중 한 명이었던 시카고 트리뷴의 유명기자 샘 스미스가 ESPN Sports Century 다큐멘터리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운명의 5차전을 앞두고 조던이 기자 세 명에게 다가와서, 불스가 3차전만에 스윕당할 것이라고 예상한 기자를 툭 치며 "우리가 당신은 이미 처리했고요(We took care of you)"라고 하고 4차전을 예상한 기자를 치며 "당신도 처리했고요"라고 하고, 5차전 만에 클리블랜드 승리를 예상한 스미스를 툭 치며 "오늘 당신을 처리할 겁니다"라고 장난스럽게 말했다고 한다. 홈에서 열린 1, 2차전에서 1승 1패씩, 시카고에서 열린 3, 4차전에서도 1승 1패를 나눠갖게 되고 운명의 최종 5차전(당시 1라운드는 5전3승제)을 맞게 된다. 당시 클리블랜드는 부상에도 불구하고 맹활약을 한 크레익 일로가 (벤치에서 출전해 24점) 역전 레이업을 넣으며 종료 직전에 1점차로 앞서게 된다. 시리즈 전부가 3초만에 결정나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불스는 조던에게 어렵사리 공을 건네고 조던은 두 번 공을 튕긴 후 3점 라인 한발짝 앞에서 점프했다. 일로가 공중에서 그에게 붙었으나 조던은 특유의 체공력으로 더블펌프를 하며 일로가 지나갈 때까지 기다린다음 슛, 낮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슛은 림을 두 번 앞뒤로 튕기더니 그대로 들어갔다. 바로 전설로 남은 '''The Shot'''이었다.[* 영어에서 the ~라고 하면 별 설명이 필요없을 정도로 대단한 뭔가를 뜻한다. 이는 NBA 역사상 최초로 시리즈 최종전에서 나온 시리즈를 결정짓는 버저비터였으며, 이 기록은 30년간 유지되다가 2019년 [[토론토 랩터스]]의 [[카와이 레너드]]가 필라델피아를 상대로 한 7차전에서 버저비터로 승리하게 된다. 7차전에서 나온 최초의 시리즈 위닝 버저비터. 다만 지고 있는 상태에서 최종전에서 버저비터로 승리한 것은 아직도 조던의 더 샷이 유일하다.] 조던은 시리즈 평균 39.8점 5.8리바운드 8.2어시스트에 야투율 51.8%를 기록한다. 다음 시리즈인 닉스 전에서 2번시드 [[뉴욕 닉스]]를 또 업셋한 불스는 동부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디트로이트 피스톤즈]]에게 2-4로 패하고 만다. 그러나 불스는 이 시즌에 최강 전력을 뽐내던 디트로이트에게 '''패배를 안긴 유일한 팀'''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괴물같은 기량을 선보였음에도 계속해서 우승에 실패하는 조던에 대해 '혼자 잘할 뿐 우승할 능력이 없는게 아닌가'란 여론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물론 생각해보면 쓸만한 조력자 하나 없이 우승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되며, 위에 언급됐다시피 불스는 엄청난 전력상 열세에도 불구하고 조던의 존재만으로 디트로이트의 가장 버거운 도전자였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언론이나 팬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데뷔하자마자 뛰어난 기량을 보였던 유잉에게도 뉴욕 팬들은 바로 팀을 우승권으로 못 이끈다며 야유를 퍼부었다.] 당시 [[매직 존슨 vs 래리 버드]] 라이벌리를 통해 NBA의 양대 왕조로 군림하던 셀틱스나 레이커스를 포함해 대부분 농구인과 관객들 대부분이 스타플레이어 1명의 득점보다는 전체적인 팀 밸런스를 맞추는 공격과 수비를 지향하고 있었으며, 득점왕은 이기적인 플레이의 산물이라는 인식이 있었다. ~~셀틱스나 레이커스나 스타플레이어 집합소였다는건 일단 제끼고~~ [[디트로이트 피스톤즈]]도 그랬었지만 조던의 우승 전까지 매번 나오는 말 또한 "득점왕은 우승할 수 없다"였을 정도. 물론 조던은 이런 인식을 박살내고 양자를 공히 독식함으로써 그를 따라잡고자 하는 이들에게 좌절을 안겨 주었다. 실제로 조던 이후로도 득점왕과 챔피언을 독식한 건 [[샤킬 오닐]] 1명, 그것도 한 시즌뿐이다. 계속해서 플레이오프에서 좌절을 겪으며, '혼자만 아는 선수이고, 득점왕은 팀을 우승시키지는 못한다'는 악평을 많이 듣던 중 1988년 [[필 잭슨]] 감독과 텍스 윈터스 코치를 만나고, 그들이 도입한 트라이앵글 오펜스로 인해 그의 공격 부담이 줄고 조던도 그 영향을 받아 팀플레이에 눈을 뜨게 되었다. 정확하게는 필 잭슨이 감독으로 부임한 것은 1989년이고(그 전에 1년간 코치로 재직) 텍스 윈터가 코치로 부임한 것은 1985년이다. 잭슨 이전에 불스의 감독은 덕 칼린스였는데 당시 그는 윈터와 팀 전술을 두고 의견 충돌이 있어서 윈터가 사임하고자 했다. 그러나 불스 구단은 오히려 윈터의 사임을 만류하고 칼린스를 해임하면서 잭슨을 감독으로 올리게 된다. 이전까지의 공격방식은 좋게 말해 스윙 오펜스, 나쁘게 말하면 '조던에게 공을 줘!'. 실제 배드 보이즈라고 불리는 디트로이트 피스톤즈를 상대로 승리한 뒤에 덕 칼린스는 "우리의 전술은 하나다. 조던한테 공 주고 다 꺼져(...)" ~~그래서 조던 룰 만나니 쩔쩔...~~ 물론 에이스 대접은 당연했고 그 때문인지 조던은 처음에 트라이앵글 오펜스의 도입을 반대했다. 당시 조던은 "노마크에서 동료가 던지는 것보다 내가 수비를 하나 둘 달고 던지는 게 성공률이 높은데 왜 내가 볼을 돌려야 하나?"라고 반발했다고 한다. 이 말은 비유가 아니었다. 실제로 1987-88 시즌 당시 집중수비에 시달리던 조던은 53.5%로 35점을 넣었는데 받아먹기만 하던 동료들을 제치고 '''팀 내 야투율 1위였다'''. 그 다음 시즌에도 53.8%로 팀내 1위는 조던이었다. 그 다음 시즌엔 2.3점 넣은 닐리가 0.3% 높았지만... 진짜로 조던이 더블/트리플 팀 제치고 던지는게 와이드 오픈 상태의 동료들보다 성공률이 높았던 것이다. 90-91시즌이 되어서야 팩슨, 그랜트, 벤치에서 윌 퍼듀 등 공격 성공률이 높은 선수들이 나오기 시작하나 이때도 조던은 가장 성공률 높은 공격수 중 하나였다. 그러나 일단 시켜보니, 자신이 집중 견제를 덜 받고 부담이 덜 가는 점을 마음에 들어 했다고. 즉 트라이앵글 오펜스는 반강제로 도입한 것이 아니었으며 조던과의 합의하에 도입한 것이다. 필 잭슨의 첫 번째 자서전 'Sacred Hoops'를 보면 당시 조던이 본인의 공격부담을 줄일 수 있는 트라이앵글 오펜스에 흥미를 가졌다고 나와있다. 막말로 당시 조던의 팀 내 입지는 윈터 코치나 잭슨 감독보다 훨씬 높았다. 당시 시카고 불스의 GM조차 조던한테는 한 수 접어줬다. 조던의 절친한 동료였던 찰스 오클리를 트레이드시키려 하자 조던이 제리 크라우스의 사무실까지 쳐들어와(...) 따지기 시작했고 이에 제리는 조던을 달래느라 쩔쩔 맸다고. 당시 조던의 상품가치를 생각하면 제리의 심정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 외에 사족이지만 사실 조던은 시카고 GM인 제리 크라우스를 상당히 싫어했다. 비만으로 고생하는 제리가 버스에 올라탈 때마다 짐승 울음소리를 흉내냈다는 일화도 있으며 명전 연설에서는 제리를 지목하면서 저 양반은 내가 안 불렀는데 왜 왔냐고 까기도 했다. 물론 조던만 제리와 사이가 개판이었던 건 아니고... [[스카티 피펜]] 역시 항목에 언급되어 있듯이 연봉 관련해서 짠돌이 제리와 대립한 적이 있고 [[필 잭슨]]도 구단과의 마찰이 심해 두 번째 쓰리핏을 달성한 후 반강제로 나가버렸다. 서구권 프로스포츠, 특히 미국 프로스포츠의 경우 유난히 그런 경향이 강하다. MLB에서도 선수가 감독에게 고성을 지르는 경우는 흔한 수준. 어찌보면 당연한 건데, 선수가 감독보다 훨씬 돈을 많이 받으니 입김이 센 것도 이상하진 않다. 지금도 선수와 감독이 트러블을 겪을 시 웬만한 거물이 아닌 이상에야 감독이 잘리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초짜 감독과 지금만큼의 명성은 없었던 윈터 코치를 조던이 싫어한다? 광속으로 잘렸을 것이다. 동양권에서야 감독 권한이 절대적인 경우가 많지만 서양에서는 선수단 장악에 실패한 감독은 가차없이 날려버린다. 감독이 뭐라고 하자 추신수가 면전에서 받아쳐서 논란이 된 것을 생각해보면 이해가 쉬울 듯. 축구화로 베컴 머리를 맞춘 퍼거슨 같은 케이스도 있지만, 퍼거슨은 거물 중의 초거물 감독인데다[* 퍼거슨 경은 NBA로 치면 포포비치 수준의 위치를 맨유 안에서 갖고 있는 사람이었다.] 베컴이 흥분해서 퍼거슨한테 욕을 해 벌어진 일이다. 루니도 퍼거슨이 심하게 갈구면 화나서 받아쳤다고 하니, 확실히 문화가 다른 것. 우리나라에서 선수가 감독한테 욕을 하거나 말대답을 하면 괴짜 취급을 받는다는 것을 생각하면 매우 다른 문화인 것이다. 이러던 도중 1989-90시즌에 웃지 못할 해프닝이 생겼는데, 조던이 그의 전매특허인 23번이 아닌 12번, 그것도 이름 마킹조차 되어있지 않은 유니폼을 입고 경기를 치른 것이다. 이 사건의 전모는 다음과 같다. 1989-90시즌 당시 원정6연전 중이던 시카고 불스는 5경기동안 고작 1승만 거두는 부진에 시달렸고, 백투백 두 번째 경기였던 올랜도 매직과의 원정 경기만을 남겨놓고 있었다. 당시 첫 시즌을 보내고 있던 올랜도는 확장팀답게 형편없는 전력이었다. 그런데 발렌타인 데이였던 이날, 경기 전에 누군가가 라커룸에서 조던의 23번 져지를 훔쳐간 것이다. 직원들은 경기장을 샅샅히 뒤지고, 심지어 원정팀 라커룸에 들어갈 수 있었던 직원들까지 전부 수색되었지만, 유니폼은 발견되지 않았다. 한편 시카고의 장비 담당 직원은 관중석에서 조던의 팬을 발견하고 그가 입고 있던 져지를 빌렸지만 이는 조던에게 맞지 않았다. 결국 당시 팀이 여분으로 들고 다니던, 이름도 없는 12번 져지를 조던이 입어야 했다. 그러나 이러한 일은 조던의 경기력엔 영향을 미치지 못했는데, 그는 47분을 뛰며 49점 7리바운드 2어시스트 0 턴오버를 올렸다. 아이러니한건 당시 스틸 1위에 오른 조던이 경기내내 공을 한 번도 훔치지 못한 것. 그러나 당시 약팀이었던 올랜도의 막판 역전극으로 경기는 올랜도의 135-129 연장전 승리로 끝난다. 조던은 경기 이후 인터뷰에서 "내가 어떻게 플레이했든 관심없다. 우리는 이겨야할 경기를 이기지 못했다."라고 패배에 대해, 그리고 유니폼 도난에 대해서도 분노했는데, 이는 노스캐롤라이나 대학 시절 반바지를 커리어 내내 유니폼 아래에 입을 정도로 징크스를 중시하는 조던에겐 당연한 일이었다. 올랜도에서 굴욕적인 사태는 조던의 승부욕에 불을 붙혔는지 이후 불스는 9연승을 달렸으며, 이 기간동안 조던은 33.2점 6.9어시스트 6리바운드 2.3스틸 필드골 성공률 53% 3점 슛 성공률 47.1% 자유투 87.8%를 기록했다. 또한 유니폼 도난 경기까지 29승 20패로 6할이 채 안되는 승률을 기록하고 있던 불스는 이후 26승 7패, 8할에 가까운 승률을 올린다. 조던 본인의 경기력으론 도난 이전/이후로 나누어볼때 조던은 도난 경기(...)까지 33점 6.3어시스트 6.8리바운드 필드골성공률 51.2% 3점 38.2% 자유투 84.1% 2.5스틸과 0.6블록을 기록했지만, 도난 이후 34.4점 6.3어시스트 7.1리바운드 필드골성공률 54.9% 3점 슛 36.6% 자유투 86% 3.2스틸과 0.8블록을 기록했다. 보다시피 어시스트가 그대로고 3점 슛 성공률이 소폭 떨어진걸 빼면 주요항목 모두 기록이 올랐는데, 보통 후반기에 선수들이 체력이 떨어진다는 것을 생각하면 놀라운 일. 어쨌거나 당시 불스는 다소 부진한 시즌 전반기를 딛고 후반기에 78%에 달하는 고승률을 올리며 당시 기준으로 팀 역대 2위였던 55승을 기록하는 쾌거를 올렸는데, 이는 조던을 포함한 이들의 폭발적인 페이스 덕분이었다. 또한 이 때는 전 시즌까지만 해도 동기 [[호레이스 그랜트]]에게까지 미세하게 밀리던 입지와 실력의 [[스카티 피펜]]이 첫 올스타에[* 그러나 이때 피펜은 아직 확실한 올스타는 아니었던지라 90-91시즌에는 선정되는데 실패한다.] 선정되며 훌륭한 조력자로 발돋움하기 시작한 시즌이기도 했다. im preview 요약 문서 편집을 저장함으로써, 사용자는 본인이 기여한 콘텐츠가 CC BY-NC-SA 2.0 KR에 따라 배포되며, 해당 콘텐츠에 대한 저작자 표시를 하이퍼링크나 URL로 대체할 수 있다는 점에 동의합니다. 또한, 이 동의는 기여한 콘텐츠가 저장되고 배포된 이후에는 철회할 수 없음을 명확히 이해하고 동의합니다. 비로그인 상태로 편집합니다. 로그인하지 않은 상태로 문서 편집을 저장하면, 편집 역사에 본인이 사용하는 IP(18.118.210.6) 주소 전체가 영구히 기록됩니다. 저장